여행을 떠날 때 우리는 종종 '유명한 곳'을 먼저 검색합니다. SNS에서 본 핫플, 여행 책자에 나온 관광 명소, 수많은 사람들이 다녀간 그 장소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 나는 조금 다르게 움직여 보기로 했다. 현지인들의 일상이 흐르는 그 동네, 이름 없는 골목, 지역 주민들의 삶이 스며든 작은 마을 행사까지. 관광지 대신 ‘동네’를 여행하며 진짜 그 지역을 만나고자 한 여정의 기록이다.
지도엔 없는 이야기, 골목에서 만난 진짜 도시
서울의 성북동은 북악산 자락 아래에 숨은 듯 자리한 조용한 동네다. 한때 예술가들이 머물던 장소였고, 지금도 골목골목엔 작은 갤러리와 공방, 그리고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가정집이 섞여 있다. 유명 관광지와는 거리가 멀지만, 나는 이곳에서 진짜 서울의 숨결을 느꼈다.
성북로에서 시작해 아트북카페 ‘모티브’를 지나, 성북동 주민센터 앞의 작은 공원을 거쳐 나있는 좁은 골목길을 걸었다. 비탈진 골목을 오르다 보면 담벼락에 손으로 쓴 시 한 구절이 보이고, 어느 집 마당에선 고양이가 졸고 있다. 길을 걷는 동안 ‘이 골목엔 어떤 사람이 살고 있을까’ 상상하게 되는 것이, 동네 여행의 매력이다.
우연히 들어간 가게 ‘달빛포차’는 간판도 없이 문 앞에 고무장갑이 걸려 있는 게 전부였다. 안에서는 동네 어르신들이 막걸리 한잔에 이야기를 풀어놓고 계셨고, 생선구이 냄새에 이끌려 나도 자리를 잡았다. 메뉴판도 없고 현금만 받지만, 이런 ‘불편함’이 오히려 따뜻하게 느껴졌다.
소박하지만 강한 연결, 마을 축제와 장터
운 좋게도 내가 방문한 날, 성북동에선 ‘골목예술제’라는 이름의 작은 마을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주민들이 직접 기획하고 참여하는 이 행사는 외지인보단 지역민을 위한 자리였지만, 낯선 이에게도 열린 마음으로 맞아주었다.
마을 골목 곳곳에는 아이들이 만든 미술 작품이 걸려 있고, 동네 아티스트가 벽에 라이브로 벽화를 그리는 퍼포먼스도 있었다. 마당 한 켠에선 할머니들이 정성스럽게 만든 인절미와 손만두를 파는 부스가 있었는데, 이 음식들은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진짜 ‘동네 맛’이었다.
그곳에서 만난 박OO 씨(63)는 30년째 이 동네에 산 주민이다. 그녀는 “요즘은 동네에 젊은 사람들도 많이 이사 오고, 외국인도 늘었어요. 우리가 만든 음식이나 이야기들이 외지인들에게 전해지는 것도 참 좋죠”라며 웃었다. 축제를 통해 동네는 하나의 ‘작은 세계’로 활짝 열려 있었고, 나도 그 일원이 된 기분이었다.
로컬의 맛을 기록하다: 골목식당 인터뷰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은 먹거리다. 유명한 맛집도 좋지만, 나는 이번엔 동네 주민이 추천해준 식당 위주로 다녔다.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다정식당’이라는 작은 백반집이었다. 낮 11시에 문을 열어 오후 3시면 문을 닫는 이곳은 지역 어르신들의 단골 식당이다.
식당을 운영하는 정경자 사장님은 15년째 이 자리를 지키고 계셨다. “처음엔 반찬가게로 시작했는데, 오시는 분들이 밥도 말아달라고 해서 식당이 됐어요. 요즘은 카메라 들고 오는 젊은 친구들도 많아요. 아마 소문이 났나봐요”라며 웃으셨다.
그날의 메뉴는 제육볶음, 무생채, 청경채나물, 된장국. 투박하지만 정갈한 반찬들이 쟁반에 올랐다. 한입 먹자마자 ‘아, 이건 집밥이다’ 싶은 감탄이 나왔다. 식사 후에는 사장님과 마주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동네 사람들의 삶과 음식이 얼마나 깊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여행은 장소가 아니라 ‘사람’으로 기억된다
관광지가 주는 감탄은 크고 짜릿하지만, 동네 여행이 주는 감동은 잔잔하고 오래 간다. 눈길을 주지 않았던 골목, 스쳐 지나갔던 작은 가게, 이름 없는 축제와 평범한 사람들. 그 모든 것이 모여 나만의 여행 이야기를 만들어 준다.
이런 여행은, 지도엔 없지만 마음에 오래 남는다. 다음 여행도 유명한 곳보다, 누군가의 일상이 이어지는 조용한 동네를 걷고 싶다. 그리고 그곳의 삶을 조금 더 가까이서, 천천히 만나고 싶다.